98년 가정폭력특별법이 시행됐지만, 남편한테 맞는 여성들은 오히려 해마다 늘고 있다. 지난 9일에는 개그우먼 이경실씨가 남편에게 폭행당한 사건이 일어나 충격을 줬다. 겉으론 잘 드러나지 않은 아내에 대한 폭력 실태, 이를 바라보는 그릇된 시각과 수사관행 등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두 차례에 나눠 짚어본다.

대학 강사인 김숙경(48·가명)씨는 20여년 동안 남편한테 구타당했다. 첫아이를 낳은 뒤 김씨는 대학원에 진학하려 했지만, 남편은 반대했다. 그리고 “왜 말을 안 듣느냐”며 때리기 시작했다. 대학 교수인 남편은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날이면 김씨를 멍이 들도록 폭행했다. 김씨는 ‘최소한의’ 사회생활밖에 할 수 없었다. 남들한테 알려지는 게 두려워 친구들조차 멀리하게 됐다. 자식들을 생각해 참고 살던 그는 둘째아이가 대학에 들어간 뒤에야 남편과 별거에 들어갔다.

여성부 집계를 보면,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전국 가정폭력상담소에 접수된 가정폭력 상담건수는 99년 4만1497건에서 2000년 7만5723건, 2001년 11만4612건 등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경찰에 신고된 가정폭력범죄는 상담건수의 10~20% 수준에 불과하지만, 역시 계속 늘어나고 있다. (표 참조)

하지만 가정폭력의 심각성은 통계를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의 대부분은 폭행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김씨의 경우 상담이나 신고는커녕 주변 사람 가운데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특히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갖춘 여성은 혼자 ‘조용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더 강해 피해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경희대 정희진 강사(여성학)는 “아내에 대한 폭력은 성차별 문제이기 때문에 어느 여성이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지만, 전문직이나 중상류층 여성은 실태 파악 때 접근이 어렵고 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해 폭력이 더 은폐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 연구위원은 “중상류층 여성들의 경우 체면과 성취욕, 주변 사람들의 시선 등 때문에 폭력 사실을 감추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지난 9일 발생한 이경실씨의 경우는 대표적인 사례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씨가 남편한테 여러차례 맞아 왔다는 사실은 큰 충격을 줬다. 그는 변호사를 통해 “그동안 연예인이라는 것 때문에 힘들어도 참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가정을 지키고 살려고 했는데, 그 대가가 이렇게 돼 너무 비참하다. 그동안 남편과의 불화가 알려지는 것이 싫어서 밝고 꿋꿋하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심경을 털어놨다.

고위 관료의 아내인 최경란(50대 후반·가명)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남편한테 30년 가까이 구타를 당했다. 남편은 걸핏하면 방문을 걸어잠그고 최씨의 옷을 벗긴 채로 마구 때렸다. 하지만 최씨는 상담이나 신고는커녕 병원에 가본 적도 없다. 치료를 받다가 남들한테 알려질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최씨는 보다못한 딸의 손에 이끌려 지난해 한 상담소를 찾았지만, “이런 얘길 남한테 한 것도 처음”이라는 말만 남기고 이후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혼자 해결하려는 경우 사태는 더 악화하기 마련이다. 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 위원은 “상처가 곪을 대로 곪은 뒤 용기를 내 고소나 이혼소송을 하려 해도 병원 진단서나 주변인 진술 등 폭행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 더 큰 고통을 겪게 된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
경찰, 명백한 '범죄'불구 '가정일'로 처리

㉻문제점과 대책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겠지.”

회사원 김아무개(27·여)씨는 14일 회사 근처 식당에 갔다가 옆 테이블에서 들려온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30대 초반 남성들이 최근 개그우먼 이경실씨가 남편한테 맞은 사건을 놓고 한 말이었다. 김씨는 “‘맞을 짓’이라는 게 어디 있느냐. 설사 아내가 잘못한 것이 있더라도 구타는 명백한 범죄가 아닌가”라고 말한다.

98년 시행된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특례법)’은 가정폭력이 국가가 개입해 해결해야 할 공적 문제이며 범죄임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가정폭력을 ‘집안일’로 여기거나 폭력의 원인을 오히려 피해자한테 돌리는 인식이 가정폭력문제를 해결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가정폭력특례법에 따라 가정폭력범죄를 알게 되면 가족이 아니어도 신고할 수 있고, 신고를 받은 경찰은 즉시 현장에서 폭력행위를 막고 범죄수사를 해야 한다. 만약 출동한 경찰이 사건을 처리하지 않으면 직무유기죄에 해당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딴판이다.

“경찰에 신고했는데 화장실에 피해있는 동안 남편 말만 듣고 돌아갔다.”

“폭력으로 온몸이 멍들었다. 망치를 휘두르는 바람에 안 맞으려고 하다 손톱자국이 났다. 경찰은 쌍방과실이라며 합의하라고 했다.” (서울여성의전화 상담)

서울여성의전화가 2001년 펴낸 통계자료를 보면, 가정폭력 피해여성의 경찰신고율은 12%로, 이 가운데 36.2%가 “경찰이 집안 일이니 잘 해결하라며 돌아갔다”고 응답했다.(그래프 참조) 신고를 하지 못하는 이유에서도 “경찰이 와 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다”는 응답이 13%나 됐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가정폭력 발생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경찰의 대응력”이라며 “각 경찰서에 가정폭력 수사지침을 다시 확인하고 신속하게 대응하도록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실씨 사건에서도 경찰은 현장조사와 수사를 즉각 해야 하는데도, 이틀이 지나서야 이씨의 남편을 긴급체포했다. 경찰은 “피해자가 남편의 처벌을 꺼릴 경우 피해자 요청을 무시하고 법대로만 처리할 수 없는 고충이 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가정폭력을 부부싸움으로 바라보거나 폭력의 원인에만 눈을 돌리게 되면, 가정폭력범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서울여성의전화 박연숙 국장은 “때려도 되는 이유란 없다”며 “유치원부터 직장까지 폭력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수사기관이 가정폭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여성개발원 변화순 선임연구원(가족사회학)은 “최근에는 여성의 사회생활 증가로 부부간 갈등이 많아지면서 남편이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다”며 “아내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가부장적 의식을 깨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